

김정남의 작업
《하얀 산맥과 풍경이 된 파토스 》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심연, 자연율, 결이 흐르는 시간(Deep End, natural rhythm, Time of rhythmical flow). 작가 김정남이 근작에 붙인 주제다. 아니면 그저, 결이 흐르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자연율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자연율의 개념을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심화하고 확장하는, 그렇게 자연율의 개념을 변주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주제일 것이다. 처음엔 모호했던 개념이 점차 확신을 얻으면서 뚜렷한 실체를 얻게 된 주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까지 작업을 지지해왔던 주제들을 아우르고 종합하는 주제라고 해도 좋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존재에는 결이 있다. 자연에도 결이 있다. 나무에도 결이 있고(나이테) 바람에도 결이 있다(바람결). 물에도 결이 있고(물결) 빛에도 결이 있다(빛살). 호흡에도 결이 있고(숨결) 몸에도 결이 있다(지문). 소리에도 결이 있고 피부에도 결이 있다. 소리나 피부가 거칠다거나 부드럽다고 할 때가 그렇다. 그러므로 결은 존재의 질감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결이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결도 있다. 이를테면 마음결 같은. 그렇다면, 결은 무엇인가. 몸에 아로새겨진 존재의 증명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가 겪었을 삶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흔적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산과의 교감이 있고, 자연과의 공감이 있다. 그 교감이, 그 공감이 산맥을 따라 흐르는 결로, 율로, 주름으로, 리듬으로 정착되었다.
산맥의 골격을 캐내면서 존재의 본질을 같이 발굴했다고 해야 할까.
알루미늄판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이미지 그러므로 산맥을 새김질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알루미늄판을 대개는 남색에서 검은색에 이르는 짙은 색으로 칠한다. 이처럼 배경 화면을 어둡게 칠하는 것은 그 위에 새김질할, 새김질을 통해 드러나게 될 하얀 산맥과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외에 또 다른, 의미심장한 의미를 어둡고 짙은 배경 화면은 내포하고 있는데, 바로 심연을 상징한다. 작가가 심연이란 말을 옮겨놓은 영문의 의미가 흥미롭다. Deep End. 깊이의 끝이란 말이다. 그 끝을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그 끝에 미처 가 닿을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아마도 심연은 미처 헤아릴 수도, 미처 가 닿을 수도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부터 작가는 산맥을 건져 올리고, 산맥의 골격을 건져 올리고, 존재의 본질을 건져 올린다. 어쩌면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보다 아득한 존재의 원형을 발굴한다. 존재에 아로새겨진 원형적 기억을 캐낸다.
그러면 작가는 그 원형을, 그 원형적 기억을 어떻게 캐내고 발굴하는가. 니들을 장착한 소형 드릴을 도구로 발굴하는데, 온 신경이 곧추선 초긴장 상태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실제로 산맥이 발굴되는 과정인 만큼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한 땀 한 땀 수놓듯 이미지를 새김질하는데, 여차하면 곁길로 빠질 수도, 산맥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일이어서 드릴에 가해지는 힘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실제 작업을 보면 선 위로 니들이 지나간 자리가 여실한데, 호흡이 머물다간 자리 아니면 호흡이 순간적으로 멈춘 자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흐르면서 맺히는, 맺힌 듯 흐르는 촘촘한 주름이 자리를 잡고, 그 주름들이 모여 산세를 일구고, 마침내 산맥이 그 실체를 얻는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하얀 산맥 앞에, 산맥의 골격 앞에 서게 만든다. 때로 작은 심연 같은 옹달샘을, 그리고 더러 개인사에서 유래한, 때로 역사적인 서사를 자기 속에 숨겨놓고 있는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심연에서 건져 올린 존재의 원형, 그러므로 원형적인 기억 앞에 서게 만든다. 풍경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들고, 존재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든다. 그 깊이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서 건져 올린 파토스가 자기실현을 얻은 것도 같다.
김정남의 작업
《하얀 산맥과 풍경이 된 파토스 》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심연, 자연율, 결이 흐르는 시간(Deep End, natural rhythm, Time of rhythmical flow). 작가 김정남이 근작에 붙인 주제다. 아니면 그저, 결이 흐르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자연율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자연율의 개념을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심화하고 확장하는, 그렇게 자연율의 개념을 변주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주제일 것이다. 처음엔 모호했던 개념이 점차 확신을 얻으면서 뚜렷한 실체를 얻게 된 주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까지 작업을 지지해왔던 주제들을 아우르고 종합하는 주제라고 해도 좋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존재에는 결이 있다. 자연에도 결이 있다. 나무에도 결이 있고(나이테) 바람에도 결이 있다(바람결). 물에도 결이 있고(물결) 빛에도 결이 있다(빛살). 호흡에도 결이 있고(숨결) 몸에도 결이 있다(지문). 소리에도 결이 있고 피부에도 결이 있다. 소리나 피부가 거칠다거나 부드럽다고 할 때가 그렇다. 그러므로 결은 존재의 질감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결이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결도 있다. 이를테면 마음결 같은. 그렇다면, 결은 무엇인가. 몸에 아로새겨진 존재의 증명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가 겪었을 삶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흔적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산과의 교감이 있고, 자연과의 공감이 있다. 그 교감이, 그 공감이 산맥을 따라 흐르는 결로, 율로, 주름으로, 리듬으로 정착되었다.
산맥의 골격을 캐내면서 존재의 본질을 같이 발굴했다고 해야 할까.
알루미늄판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이미지 그러므로 산맥을 새김질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알루미늄판을 대개는 남색에서 검은색에 이르는 짙은 색으로 칠한다. 이처럼 배경 화면을 어둡게 칠하는 것은 그 위에 새김질할, 새김질을 통해 드러나게 될 하얀 산맥과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외에 또 다른, 의미심장한 의미를 어둡고 짙은 배경 화면은 내포하고 있는데, 바로 심연을 상징한다. 작가가 심연이란 말을 옮겨놓은 영문의 의미가 흥미롭다. Deep End. 깊이의 끝이란 말이다. 그 끝을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그 끝에 미처 가 닿을 수 없는 깊이란 의미일까. 아마도 심연은 미처 헤아릴 수도, 미처 가 닿을 수도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부터 작가는 산맥을 건져 올리고, 산맥의 골격을 건져 올리고, 존재의 본질을 건져 올린다. 어쩌면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보다 아득한 존재의 원형을 발굴한다. 존재에 아로새겨진 원형적 기억을 캐낸다.
그러면 작가는 그 원형을, 그 원형적 기억을 어떻게 캐내고 발굴하는가. 니들을 장착한 소형 드릴을 도구로 발굴하는데, 온 신경이 곧추선 초긴장 상태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실제로 산맥이 발굴되는 과정인 만큼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한 땀 한 땀 수놓듯 이미지를 새김질하는데, 여차하면 곁길로 빠질 수도, 산맥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일이어서 드릴에 가해지는 힘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래서 실제 작업을 보면 선 위로 니들이 지나간 자리가 여실한데, 호흡이 머물다간 자리 아니면 호흡이 순간적으로 멈춘 자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흐르면서 맺히는, 맺힌 듯 흐르는 촘촘한 주름이 자리를 잡고, 그 주름들이 모여 산세를 일구고, 마침내 산맥이 그 실체를 얻는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하얀 산맥 앞에, 산맥의 골격 앞에 서게 만든다. 때로 작은 심연 같은 옹달샘을, 그리고 더러 개인사에서 유래한, 때로 역사적인 서사를 자기 속에 숨겨놓고 있는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심연에서 건져 올린 존재의 원형, 그러므로 원형적인 기억 앞에 서게 만든다. 풍경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들고, 존재의 지문 앞에 서게 만든다. 그 깊이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서 건져 올린 파토스가 자기실현을 얻은 것도 같다.